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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退: 물러나기와 물리치기

by 글숲지기 2024. 3. 23.

아래 글은 예전 얼마간 제가 남의 공부를 제 공부삼아 했던 시절 쓴 글의 일부입니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썼던 터라  거칠기도 하고 요구사항에 맞춰 쓰다보니 다소 비약적인 부분이 보이기도 합니다.


 

退: 물러나기와 물리치기(2015)

 

 

 퇴계 退溪라는 이황의 호는 그가 은거했던 지명을 호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본래 토끼 골(兎溪)이라 불리었는데, 퇴계가 거처하면서 퇴계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호라는 것은 자경(自警)의 의미를 가진다. 고려말의 선승 혜근의 호가 나옹(懶翁:게으른 늙은이)이었다거나 정약용의 호는 여유당(與猶堂:삼가고 조심함)이었던 것도 자기 경책의 의미를 포함한 것일 테다.1) 퇴계 스스로가 조정을 멀리하고 늘 은둔하려 했으니, 퇴계의 호는 자신에 대한 경책의 의미와 동시에 자신의 삶에 대한 뜻이자 의지의 표명 그리고 세상과 거리를 두겠다는 경계와 방어의 의미를 두루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그리 지나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퇴계의 사상과 삶을 퇴退 한 글자로 규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道心도심으로 人心을 물리는 것退, 사단으로 칠정을 제어하는 것退. 골짜기로 물러나 은거한다는 소극적인 경세의 뜻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물리친다는 의미에서는 적극적인 자기 수양의 의지와 기개를 그려볼 수 있다.

 퇴계는 선배였던 정암靜庵 조광조에 대해 공부가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이 말에서 두 가지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하나는 조광조의 실패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반성일 것이다. 퇴계는 사림들에게 자기훈련에 기초한 사회적 리더쉽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훈련된 인격을 도야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자기훈련에 대한 촉구와 반성이 퇴계의 이기호발론과 경에 대한 강조로 나타났다. 율곡에 따르면 자기훈련이란 본성을 함양해 그 힘으로 운동과 변화의 세계인 기의 과불급過不及을 중화中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세대 앞서 태어난 퇴계는 아직 그 본성의 함양 수준을 신뢰하지 못했으며,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살림과 역사적 소임을 바로 자신의 호의 뜻, 退退溪에서 찾았을 것이다. 부족하다면 물러나야 하고, 부족하기에 물러나 물리치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었다. 2)그런데 그 물리려는 의지, 물리치려는 힘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다시 나아감을 기약하고, 나아가려는 힘을 비축하려는 자신감은 아닌가? ‘힘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짐짓>온축하노라’3)는 긴장된 결의와 설계가 비장한 각오로 되새김 되는 것은 아닌가?

짐짓이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을 때 붙이는 말이다. ‘짐짓은 특별히 동양사상 전반에 걸쳐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뿌리도 오랜 것으로서, 말하자면 동양문명의 바탕 색깔이다.

 

자로, 화가 나서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군자(君子)또한 곤궁’(亦窮)한지요.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야말로 짐짓 곤궁’(困窮)하다. 소인은 궁하면 곧 넘치느니.

 

 공자 일행이 천하를 주유하던 중, 아사餓死 직전의 고통을 당했던 때의 일화이다. 궁핍한 군자에 대해 힐난하는 자로에게 공자가 답한다. ‘군자란 물질적 조건이 육신의 영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줄 알면서도 입신양명을 쫓지 않고, ‘짐짓가난한 삶을 사는 존재라고. 군자란 가난한데도 즐기는”(貧而樂, 논어1:16) 존재이니, 세속의 욕망이나 몸의 욕망으로부터 알면서도 짐짓 거리를 둘 줄 아는 존재여야 한다고. 공자의 이런 시선은 현상에 대한 단선적 시선이 아니라, 나와 너, 주체와 대상, 발화와 응대를 두루 겸하거나 또는 두루 감안한 복잡한 시선이다. ‘그것은 곧 이것이지만, 꼭 이것만은 아니라, 비어 있음에 대한 이해를 고려한 언어(행위)이다. 퇴계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이는 짐짓 알면서 물러나는退 길이며, 알기에 물리치는退 것이다.4)

서양의 근대를 맹목적으로 모방해온 결과, 우리는 그들보다 더 극단화된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앞서 말했듯, 좋은 지도자의 부재, 지리적 불운, 외세의 침략, 냉전이라는 내외적 조건과 사태의 불상사가 더불어 자연의 희생을 대가로 한 모방적 근대화로 지금의 탐욕적이고, 물질 만능적인 근대화를 이루었다. 서양에 대해 물질 중심주의라고 비난하며, 동양의 정신주의를 한 때 운운했던 적도 있으나, 현재는 서양보다 더 물질중심적인 사회로 변해버렸다. 서양의 경우 늘 합리적 지성주의가 물질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해왔지만, 불운하게도 그러한 비판과 성찰이라는 지적 경책이 후발모방국들인 동양에는 내부원리로 정착되지 않았다. 특히 한국은 더욱 그렇다.

 서양철학은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와 토대주의에 대한 해체 이후, 윤리학으로 전회했다.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비판과 원자적 개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진행 중이다. 이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자리매김과 관계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을 의미한다. 이는 주자와 퇴계가 말한 성즉리, 인간의 本性 본성이 우주적 의지의 구현이며, 본연지성은 모든 생명에게 갖춰지어 있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유학의 규정과 관계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는 유학의 본령과 상통하는 것이다.

 

 근대화 이후, 성리학은 망국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고, 유교는 학문의 일부로서만 유의미하거나 일상에서는 제례祭禮 정도로 축소해버렸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기를 제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리인 성의 함양을 위한 것이라는 퇴계의 주장은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5) 세속의 면박을 모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단절된 유학에 대한 해체적 재구성 및 반성적 복원이 더욱 더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문명적 비판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윤리적 반성의 복원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사와 역사의 흐름에 뒤쳐져 결국 다시 쇠락의 길로, 땅과 나라와 경제권을 빼앗기는 곤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궁핍은 짐짓이라는 자신감과 나아가기 위한 물러남과 물리치기가 아닌 지리멸렬한 도태淘汰와 멸망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성공했는가? 현재의 천민자본주의와 물질중심주의가 원자화된 개인들이 희구하는 바인가? 현재는 최선인가? 이러한 물음들을 무시하거나, 긍정적 답변을 내놓는 것은 무지와 근시안적 이기심에 다름 아니다. “공부가 부족했다.”는 정암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단지 정암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부를 해야한다.”는 자성과 역사를 읽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성찰적 판단이었다. 현재 퇴계를 논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당신의 공부는 충분한가?”, 부족하다면, “어떤 공부를 하고는 있는가?”, 그리고 그 공부는 퇴계와 무슨 상관인가?”.

자연을 착취로 인간의 쾌락과 행복을 담보하는 지금의 반생태적 자본주의와 물질중심주의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삶의 방식인 소비와 탐욕의 인심人心6)에 대해서 퇴계는 물러나야退 하고 물리쳐야 退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무릇 공부란 물러나고 물리치는 것의 현명함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란 그런 짐짓 물러설 줄 알고, 물리치는 이들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퇴계에서 배워야 하는 역사와 역사의식이란 바로 退이 한 글자를 품고 실천하는 것일 테다.

 

 

1)배병삼, 유교(동양)문명과 21세기적 전망, 계간 사상, 1999 겨울호

2)오항녕, 오래된 미래, 조선 성리학, 조선의 힘: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역사비평사, 2010, 175~176쪽 인용 및 수정

3)배병삼, 앞의 글

4)김영민이 주창해온 알면서 모른 체하기라는 공부론과 연극적 수행으로서의 삶은 이러한 공자와 퇴계의 짐짓’, ‘(물러나기와 물리치기)’로서의 삶의 태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영민, 연극적 수행으로서의 삶, 경향신문 2014.03.14.& 김영민, 공부론, 샘터, 2010

5)한형조, 왜 퇴계-고봉 논쟁인가, 국학연구 제9, 2006, 68

6)얼마 전에서야 오리털이나 거위 털 잠바의 털이 어떻게 채취되는지 알게 되었다. 오리와 거위는 자신의 털을 인간에게 온몸을 뜯기며 강탈당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몇 달에 한 번씩 수십 차례 그러한 곤욕을 치러야 한다. 싸건 비싸건 오리와 거위 털 잠바는 오리와 거위의 비명이다. 그 비명을 듣지 못하거나 모른 체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공자는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이는 禽獸라고 짐승에 빗대었으니, 이는 금수마저 못 한 것, 즉 그 미만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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