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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내는길

by 글숲지기 2024. 3. 23.

윤리교육연구/새김글/2006323

 

 

섬으로 내는 길: 하루살림몸

 

 

지난 시간으로 공부에 관한 얘기들이 끝나기를 저는 바랬습니다. 즐거이 웃고, 감명을 받으면서도, 저만 빠지면 그러니까 몇 사람은 얘기를 못 하는 선에서 수업이 마감되기를 바랬습니다. 저는 이미 5년 전에 똑같은 물음을 받은 적이 있음에도, 여전히 제겐 물음 자체가 곤혹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고 해야 하는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말하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고 자신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날도둑 심보와 회피 심리가 죄송스러워, 최근 두 분으로부터 똑같은 물음을 받기도 해서 당시에 드리지 못한/부족했던 답변을 채우며, 정직한 만남과 소통이라는 이 수업의 의미를 살려 조금은 묵직하게(?) 여러 동학들에게 물음에 대한 제 해명을 내밀어봅니다.

 

 

- 허탕

누군가를 정직하게 만난다는 것은 아직 내겐 서툰 일이며,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그 누구가 나 자신일 경우에도 그 바르고 곧음’(正直)이라는 만남의 조건은 기만으로 쉽게 변질되곤 한다. 나는 정직의 사람이라기보다는 거짓의 사람이며, 밝힘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숨김의 사람이다. 그래서 물음은 내게 있어 생기 도는 의미물음으로 다가오기보다, 먼지를 일으키는 허탕의 물음으로 무의미의 의미를 묻는 무상스런 물음이 되고 만다. 물음을 묻기보다 물려지며, 물린 것을 질기게 풀어내려는 노력을 가하기보다는 물린 것이 알아서 헐거워질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이 물음을 대하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그 물음의 인연은 내 이런 성격의 자리잡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는 없는 모양으로 내게 다시 방치했던 그 물려있음을, 다시 되-물림을 상기시켜준다. 나는 허탕(虛蕩)인데 물음은 진탕(眞蕩)인 까닭이다.

 

5년 전 나는 이런 물음을 당하였다. “왜 당신은 공부를 하며, 당신은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가? 그리고 당신은 왜 그 공부를 나와 함께 해야 하는가?” 당연한 듯 나는 선생()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고 우연한 인연(偶然)을 어리석은 인연(愚緣)으로 만들고 말았다. 산은 내게 물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자신의 해명까지 알려준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두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물음앓이에 대한 첫 알음을 낳을 수 있었다. 나는 나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며, 내 삶과 성품의 맺힌 데 결린 데를, 내 삶의 역사의 전면과 배면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이자 두 가지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름이자 어림-어리석음이 그것이다. 나는 내가 부딪쳐온 사태에서 안다 라고 고개를 끄덕였던 거기에서 모름을 보았고 모르겠다라며 고개를 저었던 거기에서 내 어림을 보았다.

그렇지만 지금 내 삶이 겉보기에도 이 꼴인 것을 보면 내 알음의 진실은 그리 깊지 못했던 모양이며, 실제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진실을 붙잡으면 미래는 거기서”1)나온다고 했건만, 하루의 내일이 이렇게 까맣게 먹탕인 것을 보아도 그렇고, 내게 있어 하루의 시작-받음이 무척이나 곤란함으로 보아도 그렇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는 죽었던 모양으로 깨어난다. 그 기억의 모듬은 가까스로 편린들을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듯 머리 속에서 끼워 맞추어 낸다. 떠맡음이 이런 모양으로도 곤란함이 된다.

 

서울역에서 아버지를 보내고 난 후, 그 땅에 혼자 남겨진 이후 내 타향살이는 올해 들어 꼭 십년을 맞았다. 나는 어찌하여 채이고 굴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돌이켜보건대 내 십년-살이의 큰 구름들은 물음에의 채임 탓이었던 것 같다. 스물이 되는 해에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했고, 스물하나 내가 누군지 알지 못했고, 스물셋 어떻게 살아내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며, 스물다섯 왜 공부를 하는가를 알지 못했고, 스물일곱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스물아홉 다시 그 모든 물음의 하나와 마주한다.

 

- 공부2)

책을 읽는 일이 내겐 쉽지 않다. 책에 따라서 다르지만 싫증을 잘 내는 성격 탓에 이것저것 앞부분만 잠시보다 휙 던져 버리기다 대수다. 이것저것 슬쩍 건드리는 것은 많아도 내 것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그럴 맘도 신통찮다. 나 역시 고백하건대,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책을 읽어 보는 것보다 책장에 책을 꽂아 보는 것이 더 즐겁다. 그런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껏 대부분 공부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른 공부를 해왔다. 그것이 학점에 관련되건, 물음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든 간에 공부자체가 내게 목적이 되진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이런 까닭에 공부의 의미가 깨달음에게로 향함이라던가 앎에의 희열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나름의 정의에 나는 그다지 찬동하지 못한다.

공부란 “‘인부공수간(人夫工手間)’의 준말로, 본래 의미는 짐을 나르는 노동자의 수고시간이라는 의미”3)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짐의 가벼워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짐의 부피와 무게가 점점 더 커지는 듯하다. 나르고 나른다고 해서 그 끝이 보일리 만무한 까닭에 잠깐의 희열 다음 닥칠 다시 나름의 당혹과 착각의 새김 앞에서 나는 쉽사리 희열이라는 말을 쓰지 못할 듯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역사를 떠난 공부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다. ‘앎의 권리원천이 삶이라는 다소 진부해진 이 말이 삶이 소진되지 않는 이상 여전히/앞으로도 타당하기에, 삶의 바탕자리를 떠난 관조만의 희열이라는 것, 제 삶과 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앎이라는 것, 역사를 잃어버린 앎이란 것을 나는 신용하지 못한다. 주위 다수 학자연하는 이들에게서나 자칭 진보라는 지식인들 무리에게서 보듯 그 자신과 역사의 아픔을 놓치거나 등진 앎은 쉽게 암()이 되는 까닭4)이다. 윤리학적으로 보면, 그러한 공부의 뜻매김이 서양식,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으로 시작되는 정의(情義)주의적 해석의 대물림은 아닌지 그렇게 오해될 소지는 없는지 자문해 볼일인 듯하다.

김상봉은 서양 공부의 그 오래된 이해에 대해 이렇게 비평한다. “빛을 향한 그리움이 우리가 발 딛고 선 어둠의 깊이를 외면하고 망각할 때, 그때 철학하는 영혼의 순수함은 속없는 천진함이 되어버리며, 정신의 숭고는 허영과 허세가 되고 만다. 철학이 그런 허위의식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진리의 빛이 언제나 죽음과 무덤 같은 어둠의 깊음을 지나서만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5)그리고 그는 우리의 공부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은 말함이 아니라 들음이요, 설교와 주장이 아니라 물음이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물어야 할 것인가? 고난받는 인간의 아우성에 귀기울이고, 고난의 의미를 묻는 것, 오직 그것이 철학이다. 요컨대 빛과 존재가 아니라 없음과 죽음의 의미를 묻는 것, 이제 그것이 우리의 철학이어야만 하는 것이다.”6)

현대철학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유란 다름 아닌감사”7)라고 말한다. “근원적인 감사는 자기 자신이 감사 입은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8). 하지만 이러한 감사함을 가지는 공부라는 것 역시 서양의 자기중심의 표현은 아닌가 생각해 볼일인 것 같다. 물론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과 관조로부터 감사함으로의 이행이라는 것은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심은 그 은혜 받은 자에게 있지 않냐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반면, 동양의 마음에서 감사함이란 것은 그런 고마움 못지않게 미안함이란 걸 되새겨 볼 일이다. 내 부모, 친구, 아내, 이웃에게 감사하다는 말은 언제나 미안함의 부피를 동반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고맙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고맙다라는 말보다 더 큰 고마움의 표현이 미안하다라는 말의 뜻이 된다.

조심스러울지라도, 그렇다면 이렇게 공부길에 대해 의미새김을 내려도 좋지 않을까. 공부라는 것은 제 삶과 제 이웃의 삶을 돌보는 길, 그 아픔과 고난에 귀 기울이며 미안함과 감사함을 알아가는 길이며, 그 마음을 지어 나르며 갚아가는 길이라고 말이다.

 

-

대학 졸업이 가까워지며, 간혹 친구들이 내게 무슨 공부를 하는지 물을 때 나는 인생(人生)공부를 한다고 말을 했다. 이 농반진반인 불충분하고 두르는 말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내 답변이 나름의 일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學生)이란 낱말의 본래적 새김이 삶을 배우는 이(學生)’이며, 무엇보다 내가 해명해야 할 물음들이 삶()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각기 자신을 어떻게든 떠맡아야하는 이상한 존재자라고 하이데거가 말하듯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져야 하는 인간은 모두 본래적 의미에서 공부하는 노동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란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의 말도 아닐 것이다. 때론 대책 없이 삶의 짐이 지워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삶의 짐을 덜어내는 기만도 가능할 것이다.9)그렇기에 삶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 짐 나르는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한편으로 나의 공부에 대한 불명료함과 불확신은 내 삶에 대한 나의 게으름과 불성실에 대한 명료와 확신에 다름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내 눈물의 정체는 모름의 노동을 수긍하지 못하는 내 알량한 앎의 자기기만의 자기위안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내 이십대의 혼돈은 어떠한 정처나 방향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혼돈의 연유가 나에게만 주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오히려 이 후기 현대라는 시대의 혼돈과 불안의 증상에 불과했었다.

내가 산을 두 번째 만나던 날, 당신의 미로 같던 서재를 찾은 내게 산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더 지리멸렬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살아요.” 앞으로 남은 내 삶이 반평생이 될지 하루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혼돈은 아니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선생의 삶과 공부에 대한 해명에 조심스레 내 공부 길에 대한 길 냄의 이유를 이제야 이렇게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아직 내겐 너무 버거운 말이지만 조금 덜 부끄러운 삶, 조금 덜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고 말이다.

 

1)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 1983, 255

2) 비록 공부를 하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의문이며, 내가 공부를 할 만한 종자인지 스스로 의심인지라 이러한 말-씀들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그 진실성을 되물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형식적으로 나란 이가 여전히 학생(學生)이기에 그 성실함의 여부를 떠나 그 배움에 대한 나름의 해명을 아니 갖는 것도/갖지 않는 것도 몹쓸 일이라 싶어 이런 주제넘은 얘기를 달아본다.

3)工夫인부공수간(人夫工手間)’의 준말로, 본래 의미는 짐을 나르는 노동자의 수고시간이라는 의미이다. 선에서는 수행으로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조용한 가운데[靜中]의 공부라고 말하면 좌선(坐禪)을 의미한다. 또 공안을 풀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심경을 가다듬는다(alchemize)는 의미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와전되어 현재 우리들(즉 일본인)공부에 집중한다는 방식으로 생각을 거듭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碧巖錄같은 곳에서는 이것은 시간’, ‘이라고 번역한 예도 있다. ‘역시 수고하는 시간을 들여 공부한다는 것이 깨달음으로의 첩경이다라는 것이 함의되어 있다. 스즈끼 다이세츠,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선문답, 서명석, 김종구 옮김, 경서원, 1998, 97

4)컨텍스트의 암()은 텍스트김영민,컨텍스트로, 패턴으로,문학과 지성사, 1996, 34

5)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한길사, 2002, 352

6)김상봉, 같은 책, 353

7)게당크는...감사라는 말로 호명되는 그것이기도 하다.” M. Heidegger, 사유란 무엇인가, 권순홍 옮김, 고려원,1993, 156

8)Martin Heidegger, 같은 책, 157

9)맑스가 말하듯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 자신의 노동을 살아가는 자와 타인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말을 조금 바꾸어, 세상에는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한다. 자신의 공부로 살아가는 자와 타인의 공부로 살아가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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