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심리학/ 애착에 관해..../ 2006년 가을
애착愛着, 집착執着, 고희苦喜
00
가을바람이 좋다. 오랜만에 버스다. 낯익은 풍경이 조용하다. 바람을 타다 생각을 잃었다. 버스가 멈췄다. 아저씨가 시동을 끈다. 바람을 잃었다. 아저씨가 신문을 든다. 버스 시간을 맞추려나 한다. 바람이 식혀주지 않는 햇살은 따갑다. 저기 앞 멈췄던 차들이 달리길 시작한다. 옆 사람은 눈을 붙인다. 달리지 않는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차들. 멈췄을 때야 비로소 달렸던 것을 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멈추면 달렸던 것을 잊게 된다. ♬ “Sometimes keys we hold unlock the doors yet other times we stray 때론 쥐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어도 다시 길을 잃는다”. 그리고 멈춰있다는 사실도 잊는다.
길을 잃은 건지, 길이 없는지도 확실치 않다. 어디서 멈췄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여기.
01
길을 잃거나 길이 없다는 사람의 길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할 것이다.
02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사람들은 잃는 것만 보고서 얻는 걸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선배의 큰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아홉의 말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얻으려 하며 잃게 된다.” 얼핏 상투어가 된 “죽으려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조금 각색한 듯싶으나, 요한서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지어다”에 가깝다. 스물아홉의 말로 어울리지 않은 건 아닐테다.
03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한들한들 바람이 분다. 들 깬 눈에 엄마가 들어온다. 엄마가 부쳐준 바람이었다. 엄마는 반눈인 아들을 일으킨다. 손을 잡고 이끈다. 가게들이 다가오다, 멀어진다. 비린내, 고소한 냄새. 매운 냄새를 지나 밥 냄새. 엄마가 비빔밥을 비벼준다. 온눈을 뜬다.
“어디갔지 왔나”. “전봇대”. “어디까지 왔나”. “철물점”. “어디까지 왔나”. ...엄마는 나를 업고 나왔다. 들어간 곳은 구멍가게. ... 사발면 포장위에 올려진 흰 나무젓가락. 엄마는 후후~ 면발을 불어서 내게 조금씩 먹인다. 처음 먹은 라면은 달았던 것 같다.
생후 100일 즈음에 내 오줌에서 피가 섞여 나왔다고 한다. 엄마아빠는 근 반년이상을 부산의 유명하다는 소아과를 전전했다. 밀양에선 기차로 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완치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백초당이라는 동네 한의원 할아버지에게 갔다. 할아버지는 신장염이라고 하며, 한 첩의 처방을 주었다. 그 약을 달여 먹인 다음에 피가 말끔히 멎었다. 외동인데다, 늦둥이인 탓에 부모의 속앓이는 자심했었다. 자라면서 드물지 않게 당시의 얘기를 들었다. 간혹 요즘에도 엄마는 손사레를 치시며, 그 때 다 늙었다고 한다. 아빠는 다시 심각해져, 그 때 머리가 다 쉬었다고 한다.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는 계모셨다. 엄마의 친엄마는 엄마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엄마아래 동생이 하나 있었다는데, 동생도 열 살 무렵 마을에 홍역이 돌 때 죽었다고 한다. 계모가 오기 전까지 엄마는 여러 고모들에게 둘러싸여 각별한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곧 엄마는 찬밥신세가 되었다. 계모는 딸 둘과 아들 셋을 나았다. 이복동생과 근 십년차가 나던 엄마는 배다른 동생들을 하나씩 업어 키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머리채를 잡힌 채 집으로 끌려온 이후로는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엄마는 동생을 키우고,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왔다. 그렇지만 계모인 외할머니는 엄마를 계속 눈에 가시로 두었다. 엄마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막내고모까지 시집을 간 후에 엄마의 수렁은 더욱 깊어졌다.
엄마는 가끔 이복동생들 돌보던 때를 얘기한다. 엄마가 가장 예뻐했던 건 작은 외삼촌이었다. 삼촌은 엄마 등에 업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부야,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면 호강 시켜주께.” 엄마는 그 말을 전하면서 흐뭇해 하지만, 금방 일년에 얼굴 한번 볼까말까한 현실로 되돌아오고 만다. 엄마는 배다른 동생들에게조차 좋은 누이였던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엄마는 여덟살 때까지 집안 식구들을 귀염을 받고 자란 덕에 안정적 애착이었던 것 같다. 세월값으로 거듭 난고를 치르면서도 엄마는 씩씩하고 건강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기였을 때 나는 낯을 만이 가렸다고 한다. 낯선 사람에게는 절대 안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엄마가 가까이 있으면 괜찮았던 것 같다. 엄마의 자식사랑은 눈물겹다. 지금도 엄마는 아들이라면 껌벅 죽는다. 아마 내가 부모라면 내 자식에게 우리부모처럼 하지는 못할 듯싶다. 부모의 집착 가까운 애착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아빠에게 자신의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아들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라며.
지금도 당신들에게 업혀 살고 있는 나는 그때 너무 쉽게 얘기를 했던 듯하다. 단지 속박이 싫었을 뿐, 당신들의 개별적 삶, 나와 별개인 당신들 각자의 세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이중적이었다. 엄마에게 한 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게 엄마는 가끔 부정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때는 그랬다. 엄마는 이해받지 못했다. 나는 이해받기만을 원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에겐 하나를 알든 열을 알든 스스로 겪어봐야 아는 것이 있다. 사랑이나 아픔, 슬픔, 배고픔, 가난 등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기 힘든 것이다. 머리의 일이 아니라 마음과 몸의 일이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한계’라는 깨달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나의 한계를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당신들의 한계와 고된 살림살이를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04
깨달음은 어디까지려나. 이 말은 이 말보다 나은가. 어리석음은 어디까지려나.
05
세월이 몇 십년이 지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엄마와 외할머니 사이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아보였는데도,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의 상처와 인내는 지독하게 깊었던 듯하다. 나에 대한 집착같은 애착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06
아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절친한 사람은 한 됫박씩 말을 거든다. 피부가 왜 그러냐고? 부모님마저 자식의 곱던 피부에 난 여드름 때문에 약을 짓겠다며 걱정을 내놓으신다.
아프리칸식 소스의 숯불 닭다리 두 개와 양념 닭 반마리가 원인인 듯도하고, 묵묵해진 한 소쿠리정도의 조치원복숭아가 원인이 듯도 하지만, 활화산지대가 되어버린 내 이마의 근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석달 째 접어든 활화산 같은 화농성 여드름은 쉬이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때의 어떤 사건을 계기로, 내․외부적으로 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그것이 앞으로 기대치 못한 흉한 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일종의 징크스이다. 몸과 맘이 불일불이(不一不二)이라는 상식에 대한 깨달음인지도 모를 테지만 말이다. 클리쎼한 자기반성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내린 여드름에 대한 진단이 한의원의 그것과 가깝다는 것이다. 사건발생이후 두달 만에 찾은 한의원에선 심장에 열이 위로 분출되어 그렇다고 했고, 혈액순환이 되지 않는 것도 원인이라고 했다. 요점은 내 속에 불이 있다라는 것. 한의원의 진단은 그랬다.
일전에 나는 어느 글에서 내 마음의 지형을 동화서독이라 밝힌 적이 있다. 동의 火와 서의 毒이 중원(心中)을 탐한다고. 결국 따지고 보면 내 몸의 기(奇)현상의 근본원인은 내 마음의 불과 독을 다스리지 못한 체 마음을 탐에 넘긴 것이라는.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것.
07
어릴 적 애착이 건강한 삶의 보장이 될까. 애착이 쉽사리 집착으로 진화되지는 않는가. 애착과 집착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 듯하다. 애착이 쉽게 집착이 되는 까닭이다. 아이의 애착은 안쓰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의 아이 같은 애착은 집착의 포장일 뿐일 것이다.
세상에 내가 받아들여졌다라는 안도, 누군가에게 누군가로서 받아들여졌다는 인정 그러한 유대는 사람의 마음에 일생 타오를 온기의 불씨를 집힌다. 집착에 대한 경계는 나중에라도 뒤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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