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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창고/서평

길 위의 화가 한생곤의 노란버스

by 글숲지기 2024. 4. 13.

 

《길 위의 화가 한생곤의 노란버스》 ,한생곤 글과 그림, 하늘숲, 2004

 

 

 책을 읽으며 글쓴 이를 오롯이 만날 때가 가끔 있다. 그 사람이 한 권의 책인 경우가 그렇다. 책을 읽은 지 좀 흘러 가뭇하지만 반가움과 아쉬움에 몇 줄 어기적 거려본다.

 

 책에 수록된 그의 그림은 이제껏 본 어떤 그림보다 더욱 마음을 훔친다. 떼를 써서라도 한 점 얻어, 집 한 켠에 걸어두고 보고 싶을 정도다.  특히 <아버지의 등>에 마음이 머문다. 

 <아버지의 등>은 나이가 차서야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의 세월과 땀에 대한 깨달음을 화폭에 옮겼다. 피를 뽑기 싫어 도망치듯 놀고 오는 길에 처음으로 저자는 아버지의 노동을 본다.

 

 

 “아버지 혼자 피를 뽑고 계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벼들이 가득 찬 논에 아버지는 하얀 모자를 쓰고 계셨고, 피를 뽑으실 때는 허리를 숙이셨다. 그 연초록생의 벼들 속으로 허리를 숙이시면 아버지의 등이 꼭 거북이 등처럼 둥글게 선을 그었고 다시 일어서시면 하얀 모자와 상반신이 논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한 번은 논 속에 숨고 다시 한 번은 논에서 나타나는 그 모습을, 그 리듬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다. 그 단순한 아버지의 삶의 리듬을 느꼈다. 그때에서야 겨우.

 그렇구나. 아버지는 평생 저 일만 하셨을 뿐이야. 논에 있는 벼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피뽑기. ...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모든 잔소리들은 저 벼들을 보호하기 위한 피 뽑기 같은 것이였어. 일찍 일어나라, 공부해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시는 모든 잔소리는 모두 저거였어. 내가 꾀를 부리느라 도망친 저 논에서 아버지께서 묵묵히 하신 노동은 저거였어. 저거야. 바로 저거야.”

 

 그의 글과 그림에는 삶에 대한 애잔한 깨달음과 감사 그리고 따뜻함이 베어 있다. 글을 읽다보면 논문을 쓰는데 왜 7년이 넘게 걸렸는지도 납득이 되고, 버스 한 대를 집삼아 10년을 떠도는 기행도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그의 종교는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이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그에게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것은 공책空冊을 끼고 산다는 것이다.” 공책이란 ‘빈’ 책이기에,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빈 책에 둔다. 전제는 없다. 다만 “걸어가는 바로 그것이 길인 삶.” 그는 구도의 길을 걷는 행려승에 다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글에서 짚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는 한가함을 사랑하기에 돈이 아닌 시간을 택하는 삶을 산다는 대목이다.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이상하게도 시간이 없다.”

 

 나는 그의 태도를 존중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이 경우에 어떻게 된 걸까.... 비본질적인데 시간을 쓰지 않기에 그는 한가하다고 하지만... 본질적인데 시간을 쓰는 경우라면? 게다가 그렇기에 돈 또한 매개가 되지 않는다면? 그의 한가함이 부럽지만 나로선 살짝 부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그리는 아이는 없다.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과 같다.

그림은 사랑이다.

그래서 꼬치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진정한 그림이다.

내 그림이 꽃이길 열매이길

사랑이길 기도한다.

 

 한생곤의 이야기를 읽으며 늘 교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만난지 일 년이 넘었건만 얼마 전에야 소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둠을 덮어쓰듯 늘 모자로 가리고 다녔는데, 올해 들어 환하게 웃는 모습과 밝은 목소리를 자주 보고 듣고 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고 한다. 한생곤에 따르면 이 아이는 사랑이 너무 많은 거다. 절판된 이 책을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 아이는 노란 버스를 어떻게 탈까. 한생곤과는 어떤 얘기를 나누게 될까 기대를 하면서.

중고로 구한 책 안에는 저자의 이름과 번호가 적혀있었다. 011 *** 9021. 그가 직접 선물해준 책인 것 같아 왠지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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