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동아출판사, 2008
사진과 숲에 이끌렸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시도하다 수면으로 접은 지가 있어 빌 브라이슨의 책을 잡을까 말까 망설였지만 몇 장을 넘기며 종주의 맘을 굳혔다.
한반도 두 배 길이가 넘는 애팔래치아 산 길. 그 무모해 보이는 트래킹을 브라이슨은 친구 카츠와 시도한다. 책의 재미는 막돼먹은 카츠 아저씨다. 배낭이 무겁다고 가져온 식량을 내버리고, 가는 곳 마다 여자들에게 추든대고, ‘감사’하다는 한 마디를 할 줄 모르는 뚱뚱하고 예의 없는 카츠. 브라이슨의 노련한 글 솜씨 탓도 있겠지만 읽는 내내 카츠아저씨는 웃음을 선사한다. 카츠가 등장하지 않는 브라이슨만의 산행 장면엔 책의 흥이 반감된다. 하지만 카츠는 다시 돌아온다.
브라이슨은 산행을 결심하고 주위에 동행을 구해보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옛 친구 카츠. 그는 동행이 생겨 좋아라 하며 카츠의 동반이유를 묻지도 않고 길을 나서게 된다. 고졸에다 알코올 중독 경험, 자동차 보험료를 내지 못해 걸어다녀야 한다는 카츠를 그려내는 브라이슨의 글은 재밌지만 카츠에게 보내는 시선이 그리 달달하지 만은 않다. 이제껏 카츠가 아무것도 자랑스러운 성취를 해본 적이 없다는 서술에는 브라이슨의 거만이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산행이 거듭될 수록, 카츠의 공백이 커질 수록, 그리고 다시 산행을 함께 하면서 브라이슨의 냉정한 경계는 사라지고 살가워진다. 그리고 어렴풋 카츠가 왜 이 무모한 등반-몇달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고 휘청하는 무게의 배낭을 매고 3000천 킬로 이상을 걷는-을 포기할 것 같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이유를 헤아리게 된다. 산행의 의미는 성공한 브라이슨 보다 실패밖에 없었던 카츠에게 더 큰 것이었다.
산행 후 “현실의 세계, 즉 주유소와 월마트, K-마트, 던킨 도넛츠, 블록버스터 비디오 대여점, 끔찍한 상업적 세계의 끝도 없이 펼쳐진 현란함” 에 대해 냉동식품과 정크 푸드로 살을 찌워온 카츠가 일갈을 날린다.
“제기랄, 흉측하네.”
이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토로이기도 했다. 카츠는 산행을 통해 자신이 집착해왔던 것이 어떤 흉물인지를 보게 된 것이다. 브라이슨은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의 의미를 “상실”에서 찾는다. 언제든 거리를 둘 때만 그것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는 일리다. 오만도, 집착도, 요란함도, 불필요함도.... 이후 카츠는 전과는 달리 알코올에 대한 집착도 끊고 미국산 쓰레기들에 거리를 두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브라이슨은 산길을 걸으며 미국 현대사와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뒤얽힌 얘기를 들려준다. 단순하게는 트레일을 보존하려는 사람들과 개발이익으로 재미를 보려는 사람들간의 충돌로 봐도 좋을 것 같다. 그 갈등의 바깥에는 관심 없는 다수 미국인들이 존재한다지만. 브라이슨은 전자의 입장이지만 사람의 통행을 완전히 막는 극단적 보호보다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고 싶어 한다. 그가 보기에 자연 파괴의 원흉은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이다. 산림청은 산림을 보호한다는 명패 아래 보호지역에 벌목업체의 편의를 위해 도로를 건설해 주는 것이 주요 사업이다. 공단은 예산을 핑계로 공원의 동식물의 멸종을 수수방관한다. 그에 반해 트레일을 지켜온 건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대피소에서 나누는 산행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온기. 거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트레일과 대피소의 관리. 트레일이 지금과 같이 보존되는 이유는 산길을 사랑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과 봉사에 힘입고 있음을 브라이슨은 누누이 강조한다.
곰이 덮쳐올까 싶어 조마조마 잠 못이루는 브라이슨. 친구의 공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잠을 자는 카츠. 이 ‘뚱뚱보 겁쟁이 커플’이 헐떡이며 걸어가는 이 책을 한 번 잡은 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엄두가 나지 않지만 숲으로 산으로 걷고 싶다. 나의 벗과 함께. 마구마구 선물하고 싶은, 마구마구 선물했던 책이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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